2006년 10월 11일
뇌과학과 미술 / 프랭크 게리
이번 Neuroscience 2006에는 나는 안가고 대학원생 한 명이 가는데
“혹시 이번에는 달라이 라마같은 이벤트 없어?”
라고 물어보니 프랭크 게리가 온다고 한다.

이런 걸 지은 아저씨다.
건축의 공간개념과 뇌과학의 관계 뭐 이런 거에 대해 말하는려는 것 같은데, 암튼 이 대학원생은 시각이 주전공이라 자연스럽게 화제가 미술과 뇌과학의 관계로 갔다.
예를 들어 포토리얼리즘같은 걸 보자

이게 그림이다.
리처드 에스테스가 그린 저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흔히 "사진을 고대로 베낀거네." 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고대로 베꼈다”는 의미는 무언가?
예를 들어 스캐너를 생각해보자. 스캐너의 부품들은 플랫베드와 조명 그리고 렌즈와 감광소자를 포함한 광학계 등인데, 이들이 스캐너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이들이 하나의 이미지를 정의하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조명이 달라진다면 그 사진과 상관없이 읽히는 이미지도 달라진다. 플렛베드에 사진을 삐딱하게 놓으면 읽힌 이미지도 삐딱할 것이다. 렌즈에 이물질이 붙어있다면 읽힌 이미지는 뿌옇게 보일 것이다.
이상처럼 이미지는 물리적으로 잘 정의된 개념이 아니다. 물리적 영상은 그 대상체가 놓여있는 환경과, 또한 그 대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깃발이 흔들리는 이유같은 것이다. 어떤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어떤 불변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뇌가 일으키는 착각에 불과하다. 뇌에는 물리적 영상으로부터 이미지를 뽑아내 심상으로 확립하는 장치가 있는데, 실제의 광경과 그 광경을 담은 사진은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같은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고찰해보았을 때 화가가 “사진을 베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화가가 어떤 심상으로 확립된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캔버스에 재현하는데, 그 이미지를 형성한 물리적 피사체가 “사진“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베껴진 것“은 화가가 사진으로부터 주관적으로 추출한 이미지이며 재현된 물리적 영상이 아니다. 포토리얼리즘 그림들은 위의 에스테스의 그림처럼 여분의 질감을 줘서 생동감있게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파수 스펙트럼 등 물리적 측정치들이 사진과 차이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화가가 위의 그림처럼 표면에 매끈한 질감을 부여해 화면을 생기를 불어넣고자 한다면, 이 때 화가는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계획하는 것일까? 사진이, 사진기의 제한된 다이나믹 레인지 때문에, 찍힐 당시의 광경으로부터 일부만의 정보를 확보하고, 그것이 화면의 “생기”를 죽이고 있다면... 화가는 사진보다도 더욱 다이내믹 레인지가 더욱 제한된 캔버스 위에서 과연 무슨 짓을 벌여 “생동감“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사실이 우리가 뇌의 시각처리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또 하나 재미난 것은 사실은 그림이 정신질환을 진단하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분열증에 걸린 환자들의 그림들은 질감보다는 복잡한 윤곽선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유명한 예가 루이스 웨인의 경우로 병이 깊어지면서 그의 그림은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이 경향이 뇌의 시각정보처리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연구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화가들을 잡아다가 전부 머리에 전극을 꼽게 하자는 등등의 농담따먹기를 좀 더 하다 점심먹으러 갔다.
“혹시 이번에는 달라이 라마같은 이벤트 없어?”
라고 물어보니 프랭크 게리가 온다고 한다.

건축의 공간개념과 뇌과학의 관계 뭐 이런 거에 대해 말하는려는 것 같은데, 암튼 이 대학원생은 시각이 주전공이라 자연스럽게 화제가 미술과 뇌과학의 관계로 갔다.
예를 들어 포토리얼리즘같은 걸 보자

리처드 에스테스가 그린 저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흔히 "사진을 고대로 베낀거네." 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고대로 베꼈다”는 의미는 무언가?
예를 들어 스캐너를 생각해보자. 스캐너의 부품들은 플랫베드와 조명 그리고 렌즈와 감광소자를 포함한 광학계 등인데, 이들이 스캐너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이들이 하나의 이미지를 정의하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조명이 달라진다면 그 사진과 상관없이 읽히는 이미지도 달라진다. 플렛베드에 사진을 삐딱하게 놓으면 읽힌 이미지도 삐딱할 것이다. 렌즈에 이물질이 붙어있다면 읽힌 이미지는 뿌옇게 보일 것이다.
이상처럼 이미지는 물리적으로 잘 정의된 개념이 아니다. 물리적 영상은 그 대상체가 놓여있는 환경과, 또한 그 대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깃발이 흔들리는 이유같은 것이다. 어떤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어떤 불변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뇌가 일으키는 착각에 불과하다. 뇌에는 물리적 영상으로부터 이미지를 뽑아내 심상으로 확립하는 장치가 있는데, 실제의 광경과 그 광경을 담은 사진은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같은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고찰해보았을 때 화가가 “사진을 베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화가가 어떤 심상으로 확립된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캔버스에 재현하는데, 그 이미지를 형성한 물리적 피사체가 “사진“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베껴진 것“은 화가가 사진으로부터 주관적으로 추출한 이미지이며 재현된 물리적 영상이 아니다. 포토리얼리즘 그림들은 위의 에스테스의 그림처럼 여분의 질감을 줘서 생동감있게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파수 스펙트럼 등 물리적 측정치들이 사진과 차이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화가가 위의 그림처럼 표면에 매끈한 질감을 부여해 화면을 생기를 불어넣고자 한다면, 이 때 화가는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계획하는 것일까? 사진이, 사진기의 제한된 다이나믹 레인지 때문에, 찍힐 당시의 광경으로부터 일부만의 정보를 확보하고, 그것이 화면의 “생기”를 죽이고 있다면... 화가는 사진보다도 더욱 다이내믹 레인지가 더욱 제한된 캔버스 위에서 과연 무슨 짓을 벌여 “생동감“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사실이 우리가 뇌의 시각처리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또 하나 재미난 것은 사실은 그림이 정신질환을 진단하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분열증에 걸린 환자들의 그림들은 질감보다는 복잡한 윤곽선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유명한 예가 루이스 웨인의 경우로 병이 깊어지면서 그의 그림은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이 경향이 뇌의 시각정보처리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연구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화가들을 잡아다가 전부 머리에 전극을 꼽게 하자는 등등의 농담따먹기를 좀 더 하다 점심먹으러 갔다.
# by | 2006/10/11 08:20 | 업계 동향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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